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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든맨부커상 수상작 잉글리시 페이션트 톱아보기
  • 작성자 : 10fix
  • 작성일 : 2018-07-23 15:21:29
  • 조회수 : 205
골든맨부커상 수상작 잉글리시 페이션트 톱아보기


박종성(충남대 영문과 교수)

영국 골든맨부커상 제정 50년을 기념하는 지난 반세기 최고의 소설로 마이클 온다체(Michael Ondaatje, 1943 - )의 잉글리시 페이션트(The English Patient, 1992)가 선정되었다. 이 작품은 1996년에는 랄프 파인즈와 줄리엣 비노쉬 주연의 동명 영화로도 제작돼(감독: 안소니 밍겔라) 이듬해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 감독상 촬영상 등 9개 부문을 휩쓴 터이라 인지도 측면에서 애당초 유리했다. 잉글리시 페이션트가 단연코 수작인 이유를 샅샅이 더듬어 가면서 살피고자 한다. 

마이클 온다체: 혼종의 정체성


온다체는 하이픈으로 연결된 ‘혼종의 정체성’을 지닌다. 실론 섬(현재 스리랑카) 콜롬보에서 출생하여, 영국 런던의 덜위치 칼리지에서 중등교육을 받았으며, 캐나다 토론토대학을 졸업한 후 온타리오에 정착했다. 세 개의 문화권에서 성장하며 노마드로 살아온 그가 이 소설에서 이른바 “국제적 무국적자들” , “출구가 없는” 사람들, “아이러니하게 전쟁 속으로 내던져진”(278)이후 텍스트 인용은 괄호 원서 속에 쪽수만 표기함. 원서는 Michael Ondaatje, The English Patient (London: Picador, 1993)를 사용했고, 번역본은 박현주 옮김, 잉글리시 페이션트((주)그책, 2010)를 참고했음.
 사람들을 등장시키는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온다체의 모친은 영국인 무용수이었고 부친은 실론 섬에서 차와 고무를 재배하는 플랜테이션 관리인이었다. 1954년 열한 살 때 부모가 별거를 시작하면서 그는 모친과 영국으로 와서 중등교육을 받았다. 그 후 캐나다에서 줄곧 거주하고 있다. 그는 무국적, 혼종성, 유목주의에 끌렸고, 당연히 탈경계, 초민족, 다국적이란 키워드를 중시했다. ‘주변부’인 스리랑카 출신이 탈민족주의 서사를 썼다는 것이 자연스럽다. 한 걸을 더 나아가 이 작품이 반전(反戰), 반제국주의, 반서구주의의 면모를 지닌다. 인종과 민족과 국적의 단일성과 순수성에 천착하는 것은 차별과 배제의 이념을 낳고, 전쟁을 유발하며, 다문화주의를 위협하고, 문명의 죽음을 초래한다.

잉글리시 페이션트로 불리게 된 이유

소설 속 영국인 환자의 신원은 헝가리 출신 백작으로 사막의 지리정보를 탐사하는 고고학자이다. 그의 본명은 라디슬라우 드 알마시(Ladislau de Almásy)이다. 그런데 전쟁 중 그가 ‘잉글리시 페이션트’로 불리게 된 것은, 그에게 신원을 증명할 문서가 없고, 그가 영어를 말할 줄 안다는 이유로 편의상 의료차트에 그렇게 기록되었기 때문이다. 알마시는 시시각각 헝가리 백작, 독일군 첩자, 영국인 환자로 정체성을 바꾼다.
그렇다면 알마시의 생각의 고갱이는 무엇일까? 알마시는 국가주의, 가족주의, 소유권을 부정하는 반항아이다. 그와 불륜관계에 있는 영국인 여성 캐서린 클리프턴(Katherine Clifton)은 알마시에게 “당신은 두려워하는 모든 것은 지나쳐버리고 소유권이라거나 소유하는 행위, 소유당하며 이름이 붙여지는 행위를 혐오하죠”(238)라고 따져 묻는다. 알마시는 자신과 캐서린이 남카이로에서 “성스러운 도시의 죄인들”(154)임을 알지만, 그의 충동과 의지는 단호하다. 가령, 그는 “그의 허기는 모든 사회적 규칙과 예의를 태워버리고 싶다”(155)고 말한다. 일탈이 정당화되고, 배신이 윤리적인 행위가 된다.

사막의 의미

사막은 무국적과 무경계의 중립적 공간이다. 알마시는 기억의 샘에서 이런 말을 건져 올린다. “사막에서는 경계 감각을 잃어버리기 쉽습니다.(18). 사막은 “바람에 날리는 천조각”(138)으로 늘 경계가 변하는 공간이다. 그곳은 거센 모래바람이 기존의 지형을 바꾸며 새로운 사구(砂丘)를 만든다. 국적, 계급, 인종이 모두 지워지는 그런 비정치적인 이상적인 공간이다.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전만 해도 사막은 소유권이 없는 조용하고 평온한 공간이었다. 살상용 무기도 추악한 전쟁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유목민 베두인의 삶의 터전이었고 고고학자들의 탐사공간이었다. 그리고 그곳에는 국적을 초월한 우정이 존재했다. 그런데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모든 것이 달라졌다. 사막은 특정 국가가 점령해야 할 공간이 되었고, 사막과 관련된 지리정보학이 대단히 중요해졌다. 
지리학은 영토획득과 자원약탈에 기여한다는 점에서 제국주의 학문이다. 소설의 서두 제사(題辭)에서 런던지리학회 모임은 194-년 11월 제프리 클리프턴이 죽었던 비극적 상황을 애도하면서 강의를 시작한다. 1939년 제르주라(이집트나 리비아의 나일강 서쪽 어딘가의 사막에 있다고 전해지는 신비스러운 오아시스 도시)를 찾아 나섰던 사막탐사에서 그의 아내 캐서린 클리프턴이 실종된 사실은 간략히 언급된다. 지리학회는 영국정보국 소속  사막사진 촬영을 맡았던 제프리 클리프턴의 비극을 언급하지만, 캐서린의 사랑과 죽음(실종)은 가볍게 처리한다. 
알마시는 이렇게 자신의 절망감을 표현한다.  “1939년, 장장 10년에 걸친 리비아 사막 탐사가 끝나자, 이 광대하고 고요한 지구의 고립지대는 전쟁이 펼쳐지는 또 하나의 극장이 되었다”(138). 알마시는 “점차적으로 우리는 국적을 잃어갔지. 나는 국가를 싫어하게 되었어. 우리는 민족국가에 의해 뒤틀려버렸어”(138)라고 절망한다. 그에게 ‘민족국가’라는 이데올로기는 재앙이다. 
하지만 알마시는 세 번의 배신을 통하여 민족국가라는 이데올로기를 탈주한다. 첫째, 영국인 유부녀 캐서린 클리프턴과의 불륜이다. 둘째, 동굴 속 캐서린을 구조하기 위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 독일군에게 사막의 정보를 넘긴 일, 즉 연합군을 배신한 일이다. 알마시가 지닌 정보는 독인군 롬멜 장군의 전차부대가 리비아에서 이집트로 진격하는 데 아주 중요했다. 독인군은 에플러라는 첩자를 카이로 파견 시 안내자로 알마시가 필요했고, 알마시는 부상을 입은 동굴 속에 두고 온 캐서린을 구조하기 위해 독일군의 지프차와 비행기 연료를 얻는 게 더 중요했다. 그는 사랑하는 연인과 약속을 지키기 위해 국가라는 비인격체를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셋째, 알마시는 의도적으로 국적을, 국가장치를, 민족주의를 조롱한다. 영국군 사령부의 신분증명서와 이름을 대라는 요구에 불응하여 독일군 첩자로 간주된다. 자신이 캐서린의 남편이라 말함으로써 더욱 의심을 받게 된다.
소유될 수 없는 것, 확정될 수 없는 것의 은유인 사막과 대척점에 있는 것은, 군대와 교회와 정보기관은 국가장치를 지탱하는 중앙 집중적 조직이다. 캐서린 클리프턴의 남편인 제프리 클리프턴(Geoffrey Clifton)은 영국정보국 직원으로 그의 임무는 리비아 사막의 항공사진을 촬영하는 것이다. 영국정보국이 캐서린과 그녀와 불륜을 저지르는 알마시의 행적을 감시하는 것은 예견된 일이다. 영국정보국은 이들의 불륜을 “이 오류, 조직의 질병”(237)으로 간주하고 알마시를 감시한다. 제프리 클리프턴이 경비행기 <루퍼트>에 자신의 부인을 태우고 알마시를 향해 돌진하다 죽는 것은, 질투와 자기 파괴적 분노 탓이다. 
소설의 결말부에서 해나 역시 1945년 8월 일본에 원자폭탄이 투하되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지금부터 나는 개인의 의지는 공적인 의지와 영원히 전쟁을 벌일 것이라고 믿어요”(292)라고 선언한다. 영국인 고고학자 매독스 역시 국가주의를 혐오했다. 자신의 고향의 초록색 들판이 비행장으로 변하는 시점에 그는 전쟁을 정당화하는 마을 교회 목사의 국수주의적 설교를 듣다가 권총으로 자살한다. “누군가의 전쟁은 태피스트리처럼 섬세하게 짜인 그의 교우관계를 찢어놓았지요. (…) 작은 손짓만으로도 그에게는 충분했습니다. 총알 하나가 전쟁을 끝냈죠”(241-42). 한 발의 총성이 독자와 전세계에 전하는 메시지는 사뭇 무겁다.  
캐서린이 남편과 결별하고 알마시와 사랑을 선택한다것도 ‘개인의 의지’의 발현이다. 국가주의의 대척점에 있는 알마시는 이렇게 자문한다. 캐서린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독일군에 협조했던 “나는 그녀[캐서린]의 악마의 연인이었던 것일까요? 나는 매독스의 악마 친구였던 것일까요?”(260) 등장인물들의 개인의 의지를 선택하는 것은 국가장치에 맞서는 역담론을 구성하며 강력한 윤리성을 획득한다. 이들은 지젝의 표현대로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을 ‘삐딱하게’ 바라보는, 즉 이데올로기라는 환상을 가로지르는, 깨어 있는 인물들이다.
잉글리시 페이션트에서 가장 충격적인 두 개의 장면으로는 아마도 영국인 지리학자 매독스의 자살과 1945년 8월 일본의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폭이 투하된 소식을 접한 킵의 분노일 것이다. 킵은 동양인인 자신이 영국을 위해 대리전쟁을 치르는 것이 잘못되고 부조리한 일임을 다음처럼 인식한다. “그의 이름은 키르팔 싱, 자신이 여기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다”(287). 매독스의 자살은 전쟁을 선동하는 국가장치에 대한 적극적 저항이다. 온다체는 사막지도 제작이나 원자폭탄 제조 지식이 “새로운 전쟁, 문명의 죽음”(286)을 초래한 “치명적인 무기”가 되는 현실을 비판한다.

왜 헤로도토스의 역사가 등장하는가?

고고학자인 영국인 환자는 사막탐사 때 1890년판 헤로도토스의 역사 필사본을 휴대한다. 그가 1939년 9월에 부상당한 캐서린을 동굴 속에 남겨두고 구조용 차량과 비행기 연료를 구하러 홀로 120km 사막 길을 나섰을 때 캐서린의 옆에 두고 온 것도 바로 이 책이다. 그는 사막탐사 동안 이 책 속에 여백에 자신의 관찰과 생각을 기록하고 사막지도와 신문 스크랩을 끼워 넣는다. 이 책은 자신의 분신이자 동행자인 셈이다. 이탈리아 빌라의 영국인 환자의 방 탁자에는 이 책이 놓여있고, 그를 돌보는 해나는 이 책의 구절을 읽어주고 궁금한 점을 물어보면서 환자의 입을 통해 이야기를 전개한다.
그렇다면 알마시가 헤로도토스에 매료된 이유는 무엇일까? 알마시에 따르면, 헤로도토스를 ‘역사의 아버지’로 불리는 이유는, 역설적으로 그가 ‘거짓말의 아버지’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거짓말’이라고 한 것은 그가 역사와 허구의 경계선을 허물기 때문이다. 즉, 헤로도토스는 생활 속 일화, 구전되는 이야기, 배신과 사랑 등 일반인들이 삶의 숨결을 세밀하게 기록한 것이, ‘공식적인’ 역사기록(예를 들면, 전쟁승리의 미화되고 과장된 기록) 보다 더 진실에 가깝다고 생각했다. 온다체는 미시사(微視史) 중심의 이런 헤로도토스의 역사관을 공유한다. 

“헤로도토스는 말했지. ‘나의 이 역사책은, 시작에서부터 주요한 역사적 주장들에 대한 보충설명을 추구한다.’ 이 책에서 볼 수 있는 점은 역사가 미치는 범위 안 막다른 곳이야. 사람들이 나라를 위해 어떻게 서로를 배신하는지, 사람들이 어떻게 사랑에 빠지는지. (…) 몇 살이라고 했지, 해나?” (119)

여기서  “주요한 역사적 주장들에 대한 보충설명”이란 개개인과 사막부족들의 삶의 미시사, 개인들 간 “사랑”과 “배신”의 이야기를 의미한다. 이런 미시사는 국가장치에 의해 쉽게 포획되지 않는다. 영국군의 첩보전 승리를 기록하는 일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전쟁 중 남녀 간 진실한 사랑을 구체적으로 기록하는 일이 역사의 본령에 가깝다는 뜻이다.

이 책의 정치적 메시지는?

잉글리시 페이션트는 전쟁으로 인해 유럽이 지옥이 되고, 유럽문명이 잿더미가 된 처참한 현실을 보여준다. 6주 동안 전쟁지역이었던 나폴리는 병든 시민들의 “유령의 행렬”이 이어지고 “유럽에서 가장 많은 보유고를 자랑했던 중세의 기록들은 이미 시립 문고 저장고에서 다 타버린 후였다”(275-76). 또한, 갈색 피부를 지닌 킵은 라디오를 통해 일본에 원자폭탄이 투하된 충격을 접한 후 “폭탄 한 개. 그 다름에 또 하나. 히로시마. 나가사키”(284)라고 절망적 현실을 명료하게 인식하고 정리한다. 그런 다음 그는 영국인 환자에게 총부리를 겨누며 격분한다. 그는 “서구 지식이 일으킨 이 전율”(284)에 경악하면서 반영국적 반서구적 인물로 변모한다. 
피렌체의 빌라는 역사의 켜를 지닌 공간이다. 본래 르네상스시대에 맨션이었던 이 수녀원은 전쟁 발발 시 독일군의 주둔지였다가 후에는 연합군의 병원이 된다. 온다체는 인본주의의 본산이자 문명의 집합체인 피렌체를, 그곳의 수녀원을 불발탄과 부비트랩이 즐비한 위험한 공간으로 제시한다. 작가는 빌라 용도의 변천과정을 통해 서구문명이 당면한 위기를 잘 보여준다. 동시에 이곳은 해나가 영국인 환자를 돌보는 치유와 이해와 사랑의 공간이다. 마치 경계와 소유가 없는 조용하고 평화로운 공간인 사막처럼.
알마시와 캐서린의 사랑의 이야기는 킵과 해나의 사랑의 이야기와 중첩되면서 그 의미가 더 강렬하게 다가온다. 사랑에 빠진 알마시는 짧은 책을 완성한 후  “책의 책장에서 그녀의 육체를 떼어낼 수가 없더군요”(235)라고 말한다. 킵과 해나의 사랑에 대해서 화자는 이렇게 말한다.  “1945년, 그들의 대륙이 만난 언덕 마을의 천막 속에서, 그는 그녀의 피부에 있는 수백만 개의 세포를 긁어주었다”(226). 이처럼 중첩된 예들 속에서 사랑은 감각적인 것으로 다가오며, 자신의 갈망을 지도와 연결시키는 순간 알마시의 철학적 성찰도 돋보인다. 그는 “내가 갈망했던 것은 지도가 없는 땅 위를 걷는 것뿐 이었습니다”(261)라고 자신의 삶을 비관적으로 갈무리한다. 

이 책의 현재성

2018년 현재 지구촌을 특징짓는 단어는 국경통제와 자국우선주의이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미국우선주의(America First)와 메이 영국총리의 브랙시트(Brexit)는 난민에 대해 배타적이며, 국경통제를 강화한다. 미국은 멕시코와 접경지역에 거대한 콘크리트 담장을 세웠다. 이스라엘도 팔레스타인과 접경지역에 거대한 담장을 세웠다. 2018년 7월 13일 트럼프의 영국방문 중 런던에서 약 25만 명이 참석하여 트럼프를 규탄하다는 대규모 집회가 열렸다. 트럼프가 그간 보여준 인종차별, 편협성, 여성혐오에 대한 항의표시였다. 여전히 시리아, 아프리카 등지에서 유럽으로 난민이 쇄도한다. 한국의 경우도 약 500여명의 예민 난민들이 입국해서 심사를 받고 있다. 갑자기 한국에 공포증이 생겨났다. 자유로운 국경이동이 점점 어려워지고, 자국우선주의가 규범이 되어간다. 소설가의 중요한 책무는 신자유주의와 자국우선주의 및 배타주의에 맞서 휴머니즘과 코즈모폴리턴주의를 지향하면서 세상의 변화를 촉구하는 데 있다. 향후 한국문단에도 묵직한 주제를 다루고, 국제주의적 시각을 견지하며, 철학적 깊이와 공간적 넓이를 지닌 수작이 나오길 기대해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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