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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종일의 경제에세이지식협동조합 좋은나라의 유종일의 경제에세이입니다.


[1] 자본주의와 불평등: 토마 피케티의 <21세기 자본론>을 중심으로
  • 작성자 : 관리자
  • 작성일 : 2014-03-04 12:07:17
  • 조회수 : 3973

 

3년 전 월가에서 시작되어 전 세계로 번졌던 ‘점령하라’ 시위를 기억하는가? 2년 전 우리나라 선거판을 뒤덮었던 경제민주화 담론을 기억하는가? 금년 초 미국의 오바마 대통령이 연두교서에서 소득불평등이야말로 우리 시대의 핵심적 도전이라고 규정하고  국정의 최우선순위를 불평등 해소에 두겠다고 선언한 것을 아는가?  


최근 불평등은 사회과학의 가장 중요한 주제로 등장하였다. 오랫동안 분배의 문제는 무시하거나 뒷전으로 제쳐놓고 효율과 성장에만 관심을 두던 주류경제학계에서도     점차 분배문제 연구가 증가하고 있으며, 다원주의를 신봉하던 정치학계에서도 소수의 부유한 엘리트 계층이 정책결정에 압도적 영향력을 미친다는 실증적 연구들이 속속 나오고 있다. 불평등에 대한 관심이 이렇게 커진 까닭은 세계 대다수의 나라들에서 소득불평등이 날로 악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미국의 경우는 그 정도가 매우 심각해서 19세기 말 소위 ‘도금시대(Gilded Age)’의 수준을 재현하고 있다. 게다가 유럽에 비해 사회안전망이 부실한 미국에서는 불평등 문제에 더욱 예민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다.  


 

피케티 열풍  

 


이런 가운데 프랑스의 경제학자 토마 피케티(Thomas Piketty)가 자본주의와 불평등 문제를 정면으로 해부한 <21세기 자본론(Capital in the 21st Century)>을 내놓아 미국 사회와 전 세계 지성계를 강타하고 있다. 원래 작년에 프랑스어로 발간되었던 책인데, 지난 3월 말 영역본이 하버드대학출판부에서 발간되면서 폭발적인 반응을 불러일으킨 것이다. 로버트 솔로우(Robert Solow)와 조세프 스티글리츠(Joseph Stiglitz), 폴 크루그먼(Paul Krugman) 등 노벨경제학상 수상자들을 비롯해서 수많은 학자들이 극찬을 아끼지 않고 있으며, 온갖 매체에 서평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서점에 책은 동이 났고 주문이 엄청 밀려있는 상태다. 이 책이 무려 577쪽의 본문과 77쪽의 주석, 그리고 데이터와 수리적 모형 등 온라인으로 볼 수 있는 부록까지 포함한 매우 전문적인 경제학 서적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실로 놀라운 일이다. 필자가 이 책을 한겨레신문 칼럼을 통해 소개한 이후 우리나라에서도 피케티 열풍이 큰 관심을 끌고 있다. 미국 이상으로 불평등 문제가 심각한 것이 우리의 현실이기 때문이다. 


프랑스 엘리트 교육의 산물인 피케티는 약관 22세에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곧바로 미국의 MIT에 발탁되어 교수가 되었다. 우리나라 같으면 아직 대학생이거나 군대에 갔을 나이에 세계적인 명문대학의 교수가 된 것이다. 하지만 피케티는 3년 후에 프랑스로 돌아갔다. “쓸모없는 수학문제 풀이나 하며 사회의 근본문제는 외면하고 있는” 미국 경제학에 실망하였다는 것이다. 이후 그는 소득분배 연구에 독보적인 업적을 남겼다. 새로운 방법론을 개발하여 소득분배의 실상을 밝히는데 결정적 기여를 하였으며, 엠마누엘 사에즈(Emmanuel Saez)와 토니 앳킨슨(Tony Atkinson) 등 동료 연구자들과 함께 과거의 역사적 데이터를 추정하는 지난한 작업을 수행했다. <21세기 자본론>은 이러한 연구를 바탕으로 지난 300년간 세계의 자본 혹은 부의 축적과 소득분배의 역사를 서술하고 있다. 저서의 제목이 칼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연상시키는데, 실제로 이 책은 요즘 흔히 보는 경제학 저술과는 달리 역사와 정치에 관한 깊은 탐구를 결합하여 19세기 정치경제학의 스케일을 복원하였다. 


<21세기 자본론>은 성장과 분배에 관한 간명한 이론을 기초로 거대한 역사적 흐름을 설명하고 있으며, 우리시대의 성격과 도전에 관한 강렬한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 피케티의 이론은 경제성장의 속도가 자본의 수익률보다 낮을 때 소득 대비 자본의 비율이 증가하며, 전체 소득에서 자본소득이 차지하는 비중이 점점 커지고 불평등은 심화된다는 논리에서 출발한다. 그는 이것이 단순히 이론적 가능성이 아니라 자본주의의 일반적인 속성이며, 2차대전 이후 소위 ‘자본주의의 황금시대’에 나타난 빈부격차의 ‘대압착’은 매우 예외적인 현상이었다고 주장한다. 대다수 학자들이 1980년대 이후 소위 신자유주의 세계화 시대에 나타난 불평등의 심화를 특이한 현상으로 보고 그 원인을 규명하려고 하는 데 반해 피케티는 오히려 황금시대가 예외였다고 본다. 그는 자본주의의 속성상 불평등의 심화가 불가피하며 이는 결국 부의 세습에 기초한 특권계급이 사회를 지배하는 ‘세습자본주의(patrimonial capitalism)’를 잉태할 것이라고 경고하고, 이를 막기 위해 세계적인 차원의 부유세 도입을 제안한다. 

<21세기 자본론>은 아마도 폴 사뮤엘슨(Paul Samuelson)의 경제학 교과서 이래 경제학 전문서적으로서는 가장 성공적인 책이 될 것 같다. 사뮤엘슨의 책은 케인즈 혁명을 미국과 전 세계의 주류경제학으로 우뚝 세우는 역할을 하였고, 케인즈 이론에 입각한 ‘자본주의의 황금시대’의 가이드북이 되었다. 이미 “피케티 시대”, “피케티 혁명”이라는 신조어가 등장하기는 했으나, 과연 피케티의 책은 시대를 바꾸는 혁명의 지침서가 될 수 있을까? 

 


불평등, 무엇이 문제인가? 

 


자본주의는 원래 불평등하다. 그런데 불평등이 뭐가 그렇게 문제인가? 분배가 불평등하더라도 사람들의 소득이 오르기만 하면 좋은 것 아닌가? 불평등하면서 소득이 증가하는 것이 평등하면서 정체된 것보다 낫지 않은가? 이런 관점에서 보수주의자들은 경제정책이 ‘배고픈 문제’ 해결에 초점을 두어야지 ‘배 아픈 문제’에 신경을 쓰면 안 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는 매우 편향된 주장이다. 절대적 빈곤이 만연한 나라에서는 ‘배고픈 문제’가 우선이라는 주장이 어느 정도 타당성이 있지만, 절대빈곤을 넘어서고 나면 상대적 빈곤의 문제, 즉 ‘배 아픈 문제‘가 중요해진다. 행복이나 삶에 대한 만족도, 범죄율과 사회적 신뢰지수, 심지어는 정신적‧육체적 건강과 기대수명까지도 분배의 불평등에 의해 크게 영향을 받는다는 것이 수많은 연구에 의해 입증되었다. 더구나 경제학이 추구하는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이라는 사회적 목표는 소득의 한계효용이 낮은 부자들에게서 한계효용이 높은 저소득계층으로 소득을 재분배하고 분배를 평등화할 것을 요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다수 경제학자들이 상당한 정도의 불평등을 용인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케인즈는 <평화의 경제적 귀결>에서 부자들은 자신의 부를 소비에 탕진하지 않고 대부분 저축과 투자에 사용하기 때문에 부의 불평등한 분배가 자본축적과 경제성장을 가능하게 해준다고 주장했다. ‘배 아픈 문제’ 는 무시하고 ‘배고픈 문제’에 집중하자는 주장은 사실 분배의 평등을 추구하면 성장이 저해될 것이라는 가정에 입각해 있는 것이다. 완전한 평등 혹은 그에 근접하는 평등을 이루고자 하면 경제적 유인이 파괴되어 경제가 침체된다는 것은 사회주의의 실패가 이미 증명한 사실이며, 이를 부정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문제는 어느 정도까지의 불평등이 성장을 위해서 필요한 것인가 하는 것이다. 극단적인 평등과 마찬가지로 지나친 불평등도 성장을 해친다는 것이 최근 경제학계의 정설로 굳어지는 추세다. 지나친 불평등은 사회적 갈등을 유발하고, 사회계층 간 이동성과 경제적 역동성을 제한하며, 소비수요의 부진을 초래함으로써 경제성장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심지어 과거 신자유주의 혹은 시장만능주의의 첨병 역할을 했던 IMF도 최근에는 이러한 입장을 보이고 있다. 현재 대다수 국가들의 불평등 수준이 지나치게 높고 또한 재분배는 성장을 해치지 않기 때문에 재분배를 통해 분배를 개선하면 성장이 증대될 것이라는 매우 진보적인 주장을 내놓고 있다. 


불평등이 어떤 결과를 낳는지는 무시하고 그 자체가 정의로운 것이면 더 이상 왈가왈부해서는 안 된다는 자유지상주의적인 입장도 있다. 능력과 노력에 대한 합당한 보상의 결과 불평등이 나타나는 것은 정당하며, 정당한 보상은 그 자체로서 정의에 부합하는 사회적 가치라는 것이다. 이러한 입장을 취하는 자들은 대개 이러한 정당한 불평등은 저축과 투자, 노력과 혁신을 고취하는 인센티브로 작용하는 한다고 주장하지만, 설사 불평등이 행복이나 성장 등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하더라도 어쩔 수 없다고 본다. 행복이나 성장 등 다른 사회적 목표를 위하여 재분배를 한다면 이는 정당한 보상을 국가가 강탈하는 것으로서 정의에 어긋나는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피케티의 <21세기 자본론>은 불평등의 사회적 효용 혹은 비용을 따지지 않는다. 그는 부의 세습을 통한 불평등의 확대에 주목한다. 처음에는 정당화할 수 있는 불평등이라고 하더라도 대대손손 재산의 증식에 의해 엄청난 상속부자들이 생긴다면 이는 어떤 논리로도 정당화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노력이나 능력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이 유산을 많이 받은 자들이 부와 특권을 누리는 사회를 세습자본주의라고 부르며, 자본주의는 속성상 세습자본주의를 향해 나가게 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세습자본주의 하에서 불평등은 단순히 ‘배 아픈 문제’가 아니라 능력주의를 원천적으로 부정하는 것이다. 또한 소수 특권층으로 부와 정치적 영향력이 집중되어 민주주의를 뿌리부터 위협하고 과두적 지배체제로 귀결될 것이다. 

 


성장과 분배의 동학 

 


먼저 성장과 분배의 동학에 관한 피케티의 주장을 살펴보자. 피케티의 통찰은 자본에 대한 세후 순수익률(r)과 성장률(g) 사이의 관계가 소득분배에 미치는 영향을 간파한 것이다. 그는 r>g라는 단순한 부등식을 자본주의의 근본법칙(fundamental law)이라고 명명하고, 이 부등식이 지니는 엄청난 함의에 주목했다. 이 부등식이 성립할 때 자본-소득 비율(β)이 상승하고 전체소득에서 자본소득이 차지하는 비중(α)이 증가하게 된다는 것이다. 큰 부자들은 소득의 작은 부분만 소비해도 충분하기 때문에 저축을 통한 부의 증가율이 r에 근접하며, 소득의 증가율은 곧 성장율 g다. 따라서 r>g는 자본축적이 소득증가보다 빠르다는 것을 의미하고 이는 β의 상승을 초래한다. 또한 α=rβ의 관계가 성립하므로 β의 상승에 비례하여 r이 떨어지지 않는 한 α가 증가한다. 그런데 보통 자본은 노동력에 비해 훨씬 불평등하게 분배되어 있기 때문에 국민소득에서 자본의 몫이 커진다는 것은 곧 소득불평등의 증대를 의미한다. 


과연 r>g는 불변의 근본법칙인가? 피케티가 각고의 노력으로 장기간의 통계를 추정한 결과는 고대에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역사적으로 항상 r>g가 성립했고 오직 20세기 중반에만 이 관계가 역전되었음을 보여준다. 이 역전현상은 1930년에서 1975년 사이에 있었던 일인데, 양차 세계대전과 대공황으로 인한 부의 대량파괴와 자본과세의 획기적 강화 그리고 2차 대전 이후의 소위 황금시대의 높은 성장률이 합작해서 만들어낸 매우 예외적인 일이라는 것이 피케티의 주장이다. 황금시대에 경제발전과 소득분배의 관계를 연구한 사이먼 쿠즈네츠(Simon Kuznets)는 경제발전 과정에서 처음에는 불평등이 증가하다가 나중에는 하락한다는 ‘역-U자 가설’을 내세웠는데, 피케티는 오랜 동안 정설로 받아들여졌던 이 가설이 황금시대의 착시현상일 따름이며 불평등의 증가 경향은 자본주의의 근본적 속성이라고 평가한다.


과거는 그렇다 치더라도 미래에도 r>g의 관계가 지속될까? 피케티는 21세기에는 20세기와 같은 높은 경제성장률을 구가할 수 없을 것으로 본다. 인구증가율이 하락이 큰 요인이며, 기술발전의 속도도 과거에 비해 저하될 것으로 예측되기 때문이다. 자본축적이 지속되면서 한계수확체감의 법칙에 의한 성장률 하락도 작용할 것이다. 이 부분은 별로 논란의 여지가 없는데, 문제는 r의 하락 여부다. 소득에 비해 자본의 양이 점점 많아지고 성장률이 하락한다면 자본의 수익률도 하락하지 않을까? 피케티는 이와 관련해서 자본과 노동의 대체탄력성(σ)이 1보다 높아서 자본수익률은 별로 하락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쉽게 말하면 노동 대신 기계로 대체할 수 있는 여지가 워낙 많아서 자본의 증가에도 불구하고 임금상승에는 한계가 있고 자본의 수익률은 어는 정도 유지될 것이라는 주장이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추측일 뿐이다. 

 
‘이윤율 하락의 법칙’을 주장한 마르크스나 ‘재산소득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안락사’를 내다본 케인즈를 비롯해서 많은 경제학 이론은 r의 하락을 예견하고 있다. 자본이 많아지면 희소성이 떨어져서 자본의 수익률이 하락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시장경제의 법칙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자본축적이 많이 되어있는 미국을 비롯한 선진국들의 경우 1980년대 이후 실질이자율이 꾸준히 하락하고 있다. 자본의 공급이 수요보다 빠르게 증가한다는 의미다. 자금시장에서의 이자율과 자본의 수익률은 물론 다르다. 그러나 이 차이가 한없이 날 수는 없을 것이다. 


어쨌든 지난 30년간 실질이자율은 하락하는데 자본의 수익률은 증가한 까닭은 무엇일까? 경쟁적인 자금시장의 이자율에 비해 위험에 대한 보상과 일정한 독점이윤을 포함하는 기업들의 투자수익률은 더 높은 것이 당연한데 전반적인 자본의 수익률은 이들의 가중평균이 될 것이다. 따라서 이자율과 자본수익률의 격차가 커진 것은 결국 기업의 이윤율이 높아진 것을 의미하고, 이는 아마도 산업집중도가 높아지고 노동자의 교섭력이 하락한 것이 원인일 것이다. 제임스 갈브레이스(James Galbraith)는 r>g가 불변의 법칙이 아니고 제도와 정책에 따라 가변적이라고 보고, 특히 최저임금인상이나 노동조합의 강화 등으로 노동의 교섭력이 강화되면 임금 몫이 증가하고 자본소득 몫이 하락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딘 베이커(Dean Baker)도 현재 자본의 수익 중 많은 부분이 정부의 특혜성 정책에 의한 독점이윤으로서 향후에 이러한 정부정책은 얼마든지 변할 수 있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결론적으로 향후 제도와 정책의 변화에 따라 자본의 수익률이 상당히 하락할 여지는 충분히 있어 보인다.  

 


불평등의 실상 

 


피케티의 분석은 소득불평등 증가의 원인에 관한 경제학계의 논의를 일거에 뒤집어버렸다. 많이 알려진 바와 같이 1980년대 이후 나타나는 불평등 증가의 원인으로 노동절약적인 기술발전이나 세계화에 따른 개도국 저임금노동과의 경쟁 등이 주로 언급되었다. 그런데 이러한 분석은 고학력-고숙련 노동과 저학력-저숙련 노동 사이의 임금격차 확대에 관한 것이며, 노동소득과 자본소득의 분배에 관한 것은 아니다. 피케티는 감히 마르크스의 냄새를 풍기며 자본주의의 핵심문제는 바로 자본에 있다는 명제를 내세우고 있다.  


이러한 인식의 전환은 사실 피케티가 동료 연구자들과 함께 각고의 노력을 기울여 소득분배의 실상에 관한 실증연구를 한 결과 가능해진 것이다. 특히 그는 소득분배에 관한 실증연구의 새로운 방법론을 개척하여 소득불평등의 실상을 완전히 새롭게 조명하였다. 과거의 소득분배 연구는 주로 가계소득에 관한 샘플조사 자료를 연구했는데, 이 자료의 문제는 최고소득층의 소득이 심각하게 축소되거나 아예 누락된다는 것이다. 피케티는 사에즈 등과 함께 조세통계를 활용하여 소득분배를 추정하는 방법을 개발했다. 조세통계도 탈루소득의 문제가 있기는 하지만 샘플조사에 비해 최상위 고소득층의 소득을 훨씬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다. 나아가 조세통계를 이용하면 샘플조사가 없었던 먼 과거까지 소득분배를 추정할 수 있다. 피케티는 또한 지니계수 등 한 가지 지표로 불평등을 측정하지 않고 상위 10%, 그 다음 40%, 하위 50% 등 소득계층별로 비중을 살펴보았다. 특히 최상위 1%나 0.1% 등 최고소득계층을 집중 연구하였다. 


피케티는 이렇게 해서 미국, 영국, 캐나다, 호주 등 앵글로색슨계 국가들의 심각한 소득불평등 악화가 실상은 최상위층으로 소득이 고도로 집중된 결과임을 밝혔고, 월가점령시위를 통해서 널리 퍼진 1:99라는 새로운 프레임을 제시했다. 특히 미국의 경우 소득불평등도는 대공황 이전 ‘도금시대’의 수준을 넘어서서 역사상 가장 불평등한 나라가 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피케티의 이론에 의하면 1980년대 이후의 불평등 증가는 r>g에서 비롯된 것으로서 자본주의의 일반적 속성의 발현일 따름이다. 그런데 여기서 피케티의 이론에 한 가지 난점이 등장한다. 소득불평등이 가장 극심하게 진전된 미국의 상황을 보면 과거의 세습자본주의를 능가하는 불평등은 존재하지만 고소득자들이 단순한 상속자들은 아니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것이다. 사실 피케티는 최상위소득계층의 대다수는 그가 ‘슈퍼매니저’라고 부르는 대기업과 금융회사의 경영진임을 밝혀냈고, 이들 슈퍼매니저의 소득이 폭발적으로 증가한 것은 부자감세로 대표되는 정치적 변화의 결과라고 설명한다. 크루그만은 규제완화 또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지적했다. 어쨌든 현대 미국에서는 최상위 1%도 재산소득보다 임금소득이 더 크기 때문에 아직 세습자본주의라고 보기는 어렵다. 


하지만 조금 다른 시각에서 보면 피케티의 경고가 상당히 절박하게 다가온다. 예를 들어 솔로우는 슈퍼매니저의 연봉 중 상당부분은 임금소득이라기보다는 자본소득의 변형된 형태가 아닐까 추측한다. 설사 그들의 연봉을 전부 순수한 임금이라고 쳐도 미국에서 1980년대부터 일어난 불평등 심화의 1/3 정도는 자본소득 몫의 증가에 기인한 것으로 평가되는데, 만약 연봉의 상당부분이 실제로는 자본소득이라고 한다면 피케티의 이론은 훨씬 더 강력한 설명력을 지니게 될 것이다. 더 큰 문제는 앞으로 다가오는 미래다. 현재 불평등도가 극심하다는 사실과 오늘의 부가 내일은 후손에게 상속이 될 것이라는 사실로부터 앞으로 갈수록 세습자본주의의 성격이 진해지리라고 추론하는 것은 손쉬운 일이다. 사실 미국에서 이미 최상위 부자 열 명 중 여섯 명이 코치(Koch) 형제와 월튼(Walton) 자녀들 같은 상속자들이며, 0.1% 최고소득계층의 소득 가운데 70%가 재산소득이다.  

 


세습자본주의의 도래? 

 


피케티는 불평등 심화의 결과로 과거 19세기 유럽의 ‘벨 에포크’나 미국의 도금시대와 같은 세습자본주의가 다시 도래할 것이라고 경고한다. 세습자본주의는 부와 특권을 상속에 의해 누리는 사회다. 발자크의 소설 <고리오 영감>은 벨 에포크 시대의 실상을 보여준다. 이 소설은 고리오 영감과 같은 집에서 하숙하는 이들의 이야기를 전개하는데, 악당 보트랭이 라스티냐크에게 세상사는 법을 한 수 가르치는 장면이 나온다. 그는 출세욕에 불타는 라스티냐크에게 아무리 노력해서 성공하고 출세해도 부잣집 딸과 결혼하는 것만 못하다고 일러준다. 토마 피케티가 계산한 바에 의하면 이 조언은 19세기 유럽의 현실을 매우 정확하게 반영하고 있다. 상속재산 기준으로 상위 1%가 놀고먹으며 버는 재산소득만 해도 상위 1% 임금의 2.5배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게 바로 세습자본주의다. 열심히 노력해서 성공하는 사람보다 상속자들이 훨씬 많은 부와 특권을 누리는 사회다. 세습자본주의란, 다시 말하지만, 능력주의가 근본적으로 부정되고 민주주의가 뿌리부터 위협받는 사회다.
과연 세습자본주의의 도래는 불가피한 것인가? 피케티는 강력한 자본과세만이 이를 막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백만 유로가 넘는 재산에 대해서 1%, 5백만 유로가 넘는 재산에 대해서는 2%의 부유세를 주창한다. 이를 통해 자본의 세후수익률과 성장률 사이의 차이를 메우면 불평등 악화의 엔진을 정지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자본의 이동성을 감안할 때 이러한 과세는 세계적으로 이루어져야 하지만 이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그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유럽연합이나 미국과 같은 거대 경제권에서 먼저 실시할 것을 제안한다. 이와 함께 피케티는 최고 80%에 이르는 누진소득세를 병행할 것을 제안한다. 그는 이러한 정도의 과세가 성장에는 해를 끼치지 않을 것이라고 한다.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미국의 원로 경제학자 피터 다이아몬드(Peter Diamond)도 유사한 주장을 한 바 있다. 


하지만 모두가 이에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아직도 마르크스의 추종자들은 자본주의는 통째로 폐기해야 하며 고쳐 쓸 만한 것이 아니라고 믿는다. 시장근본주의자들은 자유로운 시장이 무한한 경제성장과 정의로운 분배를 보장한다는 믿음을 버리지 않고 있다. 케인즈의 전통에 입각해서 자본주의를 수정하고 보완하려는 입장에 서더라도 피케티의 해법을 지지하지 않는 경우도 많이 있다. 오늘날의 정치적 현실에 비추어 이런 정도의 자본과세가 조만간 이루어질 가능성은 거의 없다는 것이 한 가지 이유다. 또한 세계화된 경제에서 세율이 급격히 올라가면 다양한 탈세의 방법이 활용될 것이라는 우려도 있다. 따라서 세금 이외에 자본 수익률과 자본소득의 몫을 감소시키는 방법도 모색할 필요가 있다. 앞서 지적한 것처럼 세전 자본수익률이 고정불변의 것이 아니라 정부의 정책과 제도적 환경에 의해 상당히 변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피케티처럼 과세에만 매달릴 것이 아니라 다양한 정책과 제도 면에서의 변화를 모색해야 할 것이다.


어쨌든 최종결론은 정치다. 과거에 빌 클린턴 대통령이 “문제는 경제야, 이 바보야!”라는 선거구호로 재미를 보았지만, 필자는 거꾸로 “문제는 정치야, 이 바보야!”라고 누차 주장해왔다. 피케티도 황금시대가 종언을 고하고 불평등이 심화된 궁극적인 까닭은 정치적 변화, 즉 신자유주의 정치에 의한 것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불평등의 심화를 막고 세습자본주의의 도래를 저지하기 위해서는 신자유주의 정치를 다시 바꿔야 한다. 

 


한국경제와 피케티 이론의 적실성 

 


한국에서도 피케티 열풍이 서서히 불어오고 있는 것 같다. 필자는 벌써 네 군데의 대중 매체에 피케티 관련 글을 게재하였다. 그 중 하나는 중앙일보사가 발행하는 주간 경제지 <이코노미스트>의 창간 30주년 기념호 특집기사였고, 또 하나는 전경련의 기관지와도 같은 한국경제신문의 <맞짱토론> 기사였다. 다시 말해 한국의 보수진영에서도 피케티를 무시하기 어렵게 되었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지난 30년간 소득분배의 양상을 보면 앵글로색슨계 국가들을 빼닮았다. 외환위기 이후 불평등의 심화는 누구나 인식하고 있는 문제지만, 통계청의 샘플조사에 입각한 지표는 문제의 심각성을 제대로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흔히 통계청이 발표하는 GINI 계수를 기준으로 우리나라의 불평등도가 OECD 중간수준이라고 평가하는데, 이는 현실을 호도하는 것이다. 동국대의 김낙년 교수와 김종일 교수가 피케티와 유사하게 국세청 자료를 활용하여 추정한 바에 의하면 우리나라의 불평등 수준은 훨씬 심각하고 OECD국가 중 가장 나쁜 편에 속한다. 통계청이 발표하는 GINI 계수가 0.31 언저리에 머무는데 반해 이들의 추정에 의하면 0.37을 상회하는 것으로 나온다. 더구나 최상위 1% 혹은 0.1%로의 소득집중이 미국 못지않게 매우 빠른 속도로 진행되고 있다. 이명박 정부는 2010년경부터 소득불평등도가 약간 하락했다고 선전했는데, 이것도 통계청 조사의 오류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사실 OECD국가 중 자살율과 노인빈곤률이 최고이며, ILO 조사에서 저임금근로자 비율이 가장 높게 나타는 것이 한국의 현실이다. 우리의 소득불평등 문제가 얼마나 심각한 지 알려주는 지표들이다.


우리나라의 소득분배가 악화된 원인도 피케티의 분석에서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고도성장기의 종언에 따라 성장률이 자본의 수익률보다 낮아졌으며, 그에 따라 자본-소득 비율(β)이 상승하고 전체소득에서 자본소득이 차지하는 비중(α)이 증가하였다. 혹자는 이를 근거로 성장률을 올리는 것이 분배를 개선하는 지름길이라고 말하지만 이는 본말이 전도된 얘기다. 성장률의 하락은 인구증가율과 기술진보 속도의 하락 및 한계수확체감의 법칙과 같은 매우 근본적인 요인에 의해서 초래된 것으로써 이를 소위 친기업 정책으로 끌어올리려고 하면 결과적으로 성장률이 올라가지는 않고 분배만 더욱 악화되기 때문이다. 오히려 최저임금 인상과 노동권의 강화 등으로 노동분배율(1-α)을 상승시키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우리나라 소득분배의 악화에는 외환위기 이후 제도와 정책의 변화도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고용불안정이 심화되고 자영업이 과잉 팽창한 것이 중산층의 와해를 불러왔다. 또한 성과보상제도가 확산된 것도 임금격차의 증가를 불러왔다. 최상위 1%로의 소득집중의 원인은 미국의 경우와 유사하다. 한편으로는 기업이윤이 큰 폭으로 증가하면서 자본소득이 증가하였고, 다른 한편으로는 부자감세가 이루어지고 대기업과 금융기관 임원들의 보수가 폭증하였다.


세습자본주의에 대한 피케티의 경고도 우리나라에서 울림이 크다. 재벌 2세, 3세들이 부를 지배하고 있는 우리나라는 어찌 보면 이미 세습자본주의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최고 부자들은 자신의 손으로 부를 일군 경우가 별로 없고 대부분 선대의 재산을 물려받은 사람들이다. 재벌닷컴이 올해 집계한 ‘대한민국 상장사 100대 주식 부자’(4월15일 종가 기준) 중에서 85명이 세습재벌 가문이었다. 게다가 우리나라 재벌들은 재산만 상속하는 것이 아니라 경영권까지 상속한다. 그래서 이들 상속자들은 거대한 기업집단을 거느리면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한다. 때로는 법을 무시하고 멋대로 이익을 도모하기도 하고, 때로는 법을 자기 입맛에 맞게 만들어내기도 한다. 한국의 재벌 세습자본주의는 단단한 철옹성을 구축하고 있어서 좀처럼 새로운 대기업이 출현하기 어렵다. 마이크로소프트, 구글, 아마존, 페이스북 등 초우량 대기업과 초대형 부자가 쑥쑥 튀어나오는 미국경제와는 사뭇 다르다. 


정부는 창조경제를 주창하고, 경제혁신을 도모하고 있다. 과거에 선진국 ‘따라잡기 성장’을 할 때와 달리 이제는 ‘가지 않은 길’을 개척하고 나가야한다. 혁신적인 기업이 기존 재벌을 제치고 성장할 수 있어야 한다. 세습기득권 체제가 경제를 지배하는 한 창조와 혁신이 제대로 될 리 만무하다. 창조경제는 세습자본주의 청산에서부터 시작할 일이다. 편법적인 상속 및 증여, 그리고 재벌의 횡포와 불공정 행위를 철저히 차단하는 것이 첫걸음이다. 

 


경제민주화를 이끄는 ‘동방의 빛’ 

 


불평등의 심화와 세습자본주의의 도래를 막기 위한 정치적 실천이 우리에게 주어진 시대적 과제다. 피케티는 프랑스의 전통을 따라 ‘사회국가(social state)’의 수호를 주장하고, 유럽연합과 미국이 자본과세에 앞장서야 한다고 주장한다. 옳은 얘기다. 그러나 실현 가능성이 의심된다. 20세기 후반의 황금시대는 성장도 분배도 서구가 이끌었지만 21세기 새로운 황금시대의 주역은 달라질 가능성이 농후하다. 


세계경제의 중심은 빠르게 동아시아로 이동하고 있다. 동아시아 경제규모는 이미 미국이나 유럽연합을 능가했으며, 중국 경제는 조만간 미국을 제치고 세계 최대의 경제로 부상할 것이다. 중국이 금융부실과 불평등 때문에 망할 것이라고 희망 섞인 예측을 해대던 서구의 경제전문가들은 정작 미국과 유럽의 경제가 바로 그런 문제들로 자멸하는 현실을 목도하고 있다. 물론 동아시아가 태평성대를 구가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동아시아 각국은 모두 나름대로 심각한 사회정치적 위기를 맞이하고 있다. 특히 소득불평등 문제는 각국이 공통적으로 직면한 최대 현안이다.


한국의 현실은 세계경제의 모순과 동아시아 지역의 고민을 고스란히, 어쩌면 가장 극명하게 반영하고 있다. 한국 경제는 한 세대 남짓한 기간에 세계 최빈국에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까지 올라섰지만, 그 후로는 금융 세계화의 쓴맛과 양극화의 어두움으로 상당 부분 퇴색하고 말았다. 일인당국민소득 3만 달러를 눈앞에 두고 있지만 대다수 중산층과 서민의 삶이 피폐해지고 젊은이들은 희망과 기백을 잃어가고 있다. 최근의 세월호 대참사는 근본적인 변화의 필요성을 웅변으로 말해주고 있다.


모순이 극에 달한 만큼 변화의 기운도 강한 것이 한국의 상황이다. 2년 전 총선과 대선을 치르는 과정에서 여야가 한목소리로 경제민주화와 복지국가를 외쳤다. 재벌을 중심으로 한 강고한 기득권 세력의 저항에 막혀 가시적인 변화는 더디지만 경제민주화를 향한 거대한 역사적 흐름은 이미 시작되었다. 한국이 경제민주화를 화두로 동아시아 정치 변화의 물결을 이끌고 사회통합적인 지역경제통합을 주도하며, 세계적인 차원에서 균형 잡힌 발전의 길을 제시하는 꿈을 꿔본다. 한국이 마침내 세계를 밝게 비추는 ‘동방의 빛’이 되었으면 좋겠다.


유종일 (KDI국제정책대학원 교수/지식협동조합 좋은나라 원장)

2014.05.30